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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과 화산

세계 최대 지진 발디비아 지진

by eun303 2024.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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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5월 22일 발생한 세계 최대 규모의 지진인

칠레 발디비아 지진 이야기

 

진앙지는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에서 남쪽으로 약 570km 떨어진 루마코이며, 가장 큰 피해를 본 도시가 발디비아이다. 이 지진으로 칠레 해안에서는 최대 25m 높이에 달하는 쓰나미가 닥쳐 큰 피해를 보았다. 쓰나미는 태평양을 가로질러 진앙에서 약 10,000km 넘게 떨어진 하와이에서도 최대 10.7m 높이로 기록되었다.

 

이날 발생한 칠레 지진의 규모는 9.5로 나타났으며 지진 관측 역사상 가장 강력한 지진이다.  지구 전체가 종처럼 울리는 ‘자유 진동’이 세계 곳곳에서 관측될 정도의 위력이었다.

 

1960년 칠레에서 발생한 지진은 5월 21일부터 6월 6일 사이 아라우카니아주, 비오비오주를 중심으로 발생한 일련의 강진

이다. 이중 발디비아 지진 하루 전까지 발생한 세 차례의 콘셉시온 지진은 진원역 이 점 차 남쪽으로 내려오는 일종의 전진 활동으로 여겨진다.

3차 콘셉시온 지진이 발생한 후 불과 15분 뒤에 본진인 발디비아 지진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현지 시각 16시 20분경에는 콘셉시온과 칠로에 사이를 중심으로 한 칠레 해안가에 8m 높이의 쓰나미가 강타했다. 10분 뒤에는 10m 높이의 쓰나미가 다시 닥쳤다.

쓰나미가 닥쳤을 땐 이미 수백명에 달하는 사망자가 보고되었다. 발디비아강 하구에서 출발한 선박인 카넬로스호는 강에서 쓰나미를 맞고 앞뒤로 1.5 km 이동한 후 침몰했는데 2005년까지도 니에블라로 향하는 도로에서 발디비아강을 바라보는 지점에서 침몰 선박의 돛대가 눈에 보였다.

 

지진 이틀 후에는 푸예우에산 화산과 맞닿은 코르돈산이 분화했다. 다른 화산이 분화했을 가능성은 있으나 당시 칠레의 여러 상황으론 기록되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 칠레의 사망자 수가 5,700명으로 지진 규모에 비해 매우 작은 이유로는 진원역의 인구 밀도가 낮고 지진 활동이 활발해서 건축물에도 관행적으로 기본적인 내진  설계가 있어서로 추정된다.

 

여진 또한 다양하게 발생했는데 가장 큰 여진은 6월 6일 아이센델헤네랄카를로스이바녜스델캄포주에서 일어났다. 규모 M7.7의 이 여진은 리키녜-오프키 단층에서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5월 22일 일어난 발디비아 지진 때문에 발생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 지진은 이 지진은 나스카판이 남아메리카판 아래로 섭입하는  페루-칠레 해구에서 쌓인 대부분의 응력이 한꺼번에 방출되어 일어난 메가스러스트 지진이다. 

섭입 암권의 판과 판이 서로 충돌하여 한 판이 다른 판의 밑으로 들어가는 현상을 말하며, 해구 아래에서 일어난다.

들어가는 판의 위쪽 면을 따라 지진이 활발하게 일어나며 페루-칠레 해구에서는 이후로도 빈번한 지진이 발생하였다.

 

발디비아 지진은 전 세계 여러 곳에서 지진 해일 피해를 주게되는데  칠레 남부와 하와이, 일본, 필리핀, 중국, 뉴질랜드 동부, 오스트레일리아 동남부, 알류샨 열도까지 영향을 미쳤다.

이중 일본은 발디비아 지진의 진앙에서 매우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태평양 연안의 타 국가와 비교하면 큰 피해를 보았다. 지진이 발생한 지 약 22시간 30분 후인 5월 24일 새벽(일본 시각 기준) 산리쿠 연안 지역을 중심으로 최대 6.1 m 높이의 쓰나미가 덮쳐 일본 각지에서 피해가 발생했다. 일본 기상청은 이 쓰나미를 라고 칠레 지진해일이라고 명명했으며 

사망 및 실종 142명, 부상자 855명, 이재민 147,898명 등의 엄청난 인적, 물적 피해를 보게 되었다.

 

지진으로 안데스산맥 여러 곳에서 산사태가 발생하였으며 산사태로 인해 리니우에 호수의 물길을 막아

홍수가 발생했으며 영향지역의 10만 주민이 다양한 방법으로 대피하였고 도시 파괴를 막기 위해 CORFO, ENDESA 기업의 임직원 수백명과 칠레 공공 근로부(MOP) 소속 노동자 , 여러 군부대 등이 호수 통제를 위한 작업에 돌입했다. 27대의 불도저가 투입되었지만 댐 바로 앞의 진흙더미 대문에 이동하는 데 큰 곤란을 겪어 6월부터는 삽으로 일일이 제방을 세우기 위해 시작했다. 또한 리니우에 호수를 향한 강줄기를 막아 물 유입을 최소화하기 위해 7개 호수의 다른 유출부 강에도 전부 댐을 세워 유입을 최대한 막기 위해 시작했다. 이 댐은 나중에 전부 철거되었지만 칼라프겐 호수에는 이 당시 건설된 댐이 현재도 남아 있다.

 

매우 큰 지진 규모에 비해 피해 규모는 매우 작은 편이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단층 파괴 지역 인근 지역은 인프라 개발이 제한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발디비아 주택의 40%가 붕괴하고 2만명의 이재민이 발생했으며 시골 지역은 남부 해안을 강타한 쓰나미로 축사와 농장이 파괴되었으며 산업기반이 무너지게 되었다.

 

지진 발생 후 칠레 정부는 종합적인 재건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칠레의 대통령 호르헤 알레산드리의 노력으로 향후 비상사태에 잘 대처할 수 있으며 국가 재건을 하기 위한 새로운 기관이 수립되었다. 당시 새롭게 수립된 "경제재건부"는 칠레의 기존 경제 성장 부흥기관인 칠레 생산 개발 기구(CORFO)와 협력하여 재건 사업을 조정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와 함께 장관급 위원회인 칠레 경제 재건위원회(COPERE)가 공식적인 정부의 재건계획 수립 및 집행을 위한 위원회로 선정되었다. 생산개발 기구는 위원회의 사무국 역할을 했으며 재건계획의 준비와 세부 실행을 맡았다. 또한 위원회는 각 주별로 재건 활동을 조정하는 임무를 맡았으며 생산개발 기구는 각 주별 위원회의 기술사무국으로 활동했다. 또한 칠레가 향후 닥쳐올 재난에 더 잘 대비할 수 있도록 국가비상사태에 대한 포괄적인 국가계획 임무가 수립되었으며, 국가비상사태 시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하는 법안도 같이 통과되었다. 또한 생산개발 기구는 재난 발생 시 통신 복구 작업을 강화하고 이를 현대화해야 한다는 필요성에 따라 국영 통신사인 ENTEL를 수립했다.

1974년에는 1971년 분화했던 비야리카산 당시의 교훈으로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이 위원회를 독립적인 정부 기관으로 승격하는 법을 통과시켰고, 이는 칠레 재난정보관리국 (ONEMI)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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